우리 집 화장실에는 요즘 <로마인이야기 12권,  위기로 치닫는 제국>과 강준만의 <선샤인논술사전> 두 권이 놓여있습니다. 11권부터 시작하는 로마의 쇠망 부분을 나름 아껴두다가 최근 읽기 시작했지요. '국가 쇠망 공식이란 공식은 다 들어있어' 요즘 귀에 쏙쏙 들어옵니다.

강준만은 <한국현대사산책> <한국근현대사산책> 시리즈를 끝내고 전북대학생들이 운영하는 '선샤인뉴스'에 빠져있다고 합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유일한 탈랜트-글쓰기로 선샤인뉴스에 참여한다면서, 그동안 써온 '개념사전'을 <선샤인논술사전>으로 묶은 거랍니다. 개념이 쏙쏙 정리됩니다.(저자가 직접 보내주신 책이라 끝까지 다 읽고 마치 논술 시험 공부하듯, 때마다 몇 꼭지씩 다시 읽곤합니다. 논술 공부 잘 하고 있지요?^^)  

화장실에 책을 둔다고 나무라지 마십시오.^^ 누구나 '화장실에서는 혼자 몰입'이 가능하지 않습니까? 아랫 글은 5-6년 전에 쓴 글이므로 약간의 시점적 해석의 차이는 있겠습니다. <인물과사상>과 <로마인이야기>는 제 인생의 한 시대를 풍성하게 해 준 책입니다. 마침, 오늘 강준만의 특별강연이 연세대에서 열린다는 소식에 이 글을 포스팅해 봅니다...
081129 김진애 포스팅  



시오노 나나미 vs. 강준만

     ∙∙∙ '권력'과 한판 겨루는 작가

시오노 나나미(1937-, 이하 시오노)와 강준만(1956-)의 이름조차 모르는 식자층은 없으리라. 설령 그들의 책을 읽지 않았다 하더라도 『로마인 이야기』 모르면 ‘교양인’ 축에 못 낄지 모르고, 『인물과 사상』 모르면 ‘지식인’ 축에 못 낄지도 모른다.

비슷한 시기에 등장한 시오노와 강준만. 이들을 좋아하건 싫어하건, 인정하건 인정하지 않건, 이 별로 재미없는 시대에 ‘약속한 읽을거리’를 기다리게 해주는 인물이 있다는 것만도 썩 즐겁다. 두 인물 모두 ‘지적 오락’에 별 알레르기가 없음을 미루어본다면, 시오노와 강준만을 ‘새로운 종의 지적 엔터테이너’라 일컬어도 좋지 않을까?

1. ‘권력 동경’과 ‘권력 혐오’의 짝

시오노와 강준만은 왜 어필할까? 그 으뜸 이유야, 우리 사회 특유의 ‘권력 동경’과 ‘권력 혐오’를 대변하기 때문 아니겠는가. 권력에 대한 관심이 그렇게 뜨거우면서도 다른 한편 권력을 전혀 못 믿어하는 우리 사회 특유의 이중 심리, 권력을 향한 스토리는 그리 흥미진진하고 권력을 비판하는 것은 그렇게 통쾌한 것이다.

시오노는 유쾌하게 뒤통수를 쳤다. 동양인이 서구 역사를, 그것도 서구인들이 끔찍이 자랑해마지않는 르네상스와 로마의 역사를 천착하여 작품으로 쓴다는 것도 신선하려니와, 자기는 역사학자가 아니니 역사적 상상력을 동원해서 자유롭게 쓸 수 있다며 역사의 빈 곳까지 나름대로 해석하는 호방함도 유쾌하고, ‘리더십, 영웅, 전쟁, 권력 쟁탈’과 같은, 소위 남자의 전유물이라는 코드를 여자가 다루는 것도 통쾌하다.

강준만은 불쾌하게(?) 뒤통수를 친 셈이다. “성역은 없다, 금기는 없다.”는 선명한 깃발과 ‘실명 비판’이라는 칼을 들고서, 방패 따위는 아랑곳 않는 투사로서 등장한 것이다. 몰라서라기보다 도사려서 못하는 민감한 시사 주제를 다루는 것도 충격이었으려니와 이른바 ‘유명 인물’에 대해 그러토록 직설적 비판이 등장한 것은 한국 유사 이래 처음일 것이다. 그러니 통쾌하게 강준만의 글을 읽는 독자들도 기분만큼은 그리 유쾌하지 않을 것이다.

물론 ‘권력 동경’과 ‘권력 혐오’로 시오노와 강준만을 가르는 것은 공평치 않다. 이들은 공히 ‘건강한 권력에 대한 부끄럼 없는 갈구’를 공유한다. 시오노가 노블리스 오블리주를 갖춘 엘리트 권력을 선호하는 반면 강준만은 권력의 도덕성과 접근성을 강조한다는 점이 다르지만, 여하하든 권력 지향에 대해 내숭을 부리지 않는 것, 그 자체가 건강하다. 그 배포가 시원하다.

  2. '남자 팬'과 '여자 팬'

흥미로운 관찰 한 가지. 확인 미필 사항이지만(확인할 길도 별로 없겠지만), 시오노 팬이라 자처하는 남자가 많고, 강준만 팬이라 자처하는 여자가 많다는 것이다.

시오노의 남자 팬이야 이해가 간다. 시오노 자신의 말마따나 책을 제대로 읽지도 않고 팬이라고 자처하며 나서는 남자들이 많은 것을 보면, ‘통 크고 싶은 한국 남자’건 ‘일본식 르네상스를 갈구하는 일본 남자’건 ‘영웅주의 지향적인 남자’들이 워낙 많다는 사실 때문 아닐까.

강준만의 여자 팬은 어떤 이유에서 비롯될까? 그의 이념에 동조해서일까, 페미니스트 시각이 맘에 들어설까, ‘솔로’ 모습에 대한 연민일까? ‘안티 히어로’적인 모습에 매료되기 때문일까? 강준만의 글을 읽으면 ‘여자 같다’. 작은 것 하나 놓치지 않는 세밀함, 제기하는 이슈와 시각에 대한 고집, 조근조근 씹고 또 씹는 전개 방식, 그가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감정 드러내기’가 그렇다. 그런데 이런 ‘여자 같음’(여자의 특권적 성격으로서 사회적으로 어느 정도 인정된다는 뜻에서)이 어디 쉽게 익히거나 감히 행할 수 있는 덕목인가. 그의 글쓰기는 가히 개척적이다.

시오노의 글은 교묘하다. 주제와 소재와 필치가 무심하게 무성적이다. 그러다가 교묘한 시점에 여성인 자신의 정체성을 밝히는 대목에서 글의 설득력과 매혹성이 높아진다. 지나치게 권력자 편 아니냐, 패권 지상주의 아니냐는 비판도 시오노의 이런 매력 속에서 묻혀 버리게 만드는 것은 그가 기막히게 사용하는 전술로 보인다. 성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또는 그 경계를 오가는 시오노와 강준만의 매력은 그 자체로 파워이지만 그 효과의 차이가 있다는 것도 글쓰기 전술 차원에서 분석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보인다. 이른바 ‘적을 상정하는 글쓰기’와 ‘친구로 상정하는 글쓰기’와의 전술 차이다.

3. ‘사람, 호불호, 복권(復權)’ 전략

시오노와 강준만이 공유하는 매력적 특징이라면, ‘이야기로 만드는 파워’다. 시오노는 2천 년 전 로마든 5백 년 전 르네상스든 당장 일어나는 일처럼 그리는 힘이 있다. 마치 신문을 보는 듯, 뉴스를 듣는 듯하다. 강준만 경우야 살아 있는 인물을 다루니 당연하다고 볼 수도 있지만, ‘저자의 이슈와 독자의 이슈를 공명하게 하는 힘’이란 그리 만만한 것은 아니다.

이런 파워는 세 가지 전략 덕분에 강해질 게다. ‘사람을 중심으로 쓰는 것, 호불호가 뚜렷한 것, 그리고 복권(復權)에 대한 집념’.

사람에게 사람 이야기만큼 흥미로운 것 있는가. 역사적 사실을 묘사해도 사람 중심으로 전개하고 특정 이슈나 세력의 비판도 사람 중심으로 쓰니, 역시 ‘주인공’이 생기고 감정 이입이 생기고 드라마 같이 흥미진진해지는 것이다. 사상이라는 딱딱한 주제 역시 주인공이 되는 인물과 연관될 때 훨씬 더 생생하게 살아난다. (좌: <로마인이야기> 전 15권.저는 12권까지 갖고 있습니다... 아래: <인물과사상> 창간호 표지)

‘호불호’가 뚜렷한 것, 특히 그 호불호를 공개적으로 밝히는 것은 우리 사회 정서로서는 결점으로 꼽힘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그 한계를 넘어섰다. 예컨대, 기독교(또는 유일신교)에 대한 시오노의 불호나 끼리끼리 기득권에 대한 강준만의 참을 수 없는 분노는 그렇게 명쾌하게 밝혀져서 오히려 편하다. 사람에 대한 호불호 재미도 있다. 시오노가 카이사르를 애무하듯, 마키아벨리를 친구처럼, 그리고 체사레 보르자를 젊은 연인처럼 그리는 방식이나, 강준만이 보수적 주류에서 무시되거나 거부되거나 제대로 주목받지 못하는 논쟁적 인물들을 감정 대입하여 그리는 방식의 흡입력은 강력하다.

‘복권’에 대한 집념 역시 흥미롭다. 시오노는 마키아벨리와 체사레 보르자를 살려냈고(적어도 음모적 전술가나 호전적 독재자라는 단선적 이미지로부터는 구원했고), 강준만은 대통령이 되기 전 김대중을 살려냈고 대통령 후보 시절 노무현을 띄우려 함도 전혀 감추지 않았다. 통념적 거부, 막연한 거부, “누구누구는 어떠어떠해서 안 돼.” 같은 암묵적인 거부, 특히 이른바 주류적 시각에 대한 도전은 그 자체로 스릴 만점 아닌가. 이들의 글은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든다. 

4. 현실성과 낭만성 사이에서

시오노와 강준만은 독특한 파워로 ‘역사’와 ‘사회’라는 무거운 주제를 ‘인성화(人性化)’하는 데 성공했다. 사람 있는 역사, 사람 있는 사회로 새삼 인식케 한 것이다.

물론 시오노나 강준만은 휴머니스트와는 거리가 멀다. 따끈따끈한 냄새는 전혀 안 난다. 시오노는 극한적으로 밀어붙인 인간의 역량을 칭송할 뿐이다. 인간의 ‘위대성’에 대한 갈망이라고 할까. 강준만은 인간의 한계, 결점, 허점을 파헤치는 데 열정적이다. 인간 또는 인간 사회의 ‘위선성’에 대한 분노라 할까. 이런 점에서 시오노나 강준만은 차라리 로맨티시스트다. 시오노는 ‘로맨틱 인텔리겐차’, 강준만은 ‘로맨틱 리볼루셔너리’? 사실 신기한 점이 바로 이 점이다. 공고한 현실주의자인 듯싶은 이 두 인물이 여전히 낭만적이라는 것이 신기하기 짝이 없다.

현실성(또는 현장성)은 시오노와 강준만을 받쳐 주는 에너지다. 일단 현실 상황과 현장 메커니즘의 핵심적 맥을 짚어 내는 것이 시원시원할 뿐 아니라 그 태연자약한 냉정함이 신뢰감을 준다. 존중받아 마땅할 이들의 성실한 리서치도 한몫 할 것이다. 시오노가 1년에 한 권씩『로마인 이야기』 15권을 쓰고 있는 것이나, 강준만이 『인물과 사상』을 29권씩 내는 와중에도 『한국 현대사 산책』 15권을 펴낸 것이나, 이들의 성실성은 비판자들조차 감복시킬 정도다.

시오노의 현실주의, 예컨대 ‘로마제국은 왜 멸망했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그리 오래 버틸 수 있었는가’라는 식의 접근은 훨씬 더 현실적으로 다가온다. 이를테면 해전에 약한 로마가 ‘해전도 지상전으로 만든다’는 전략을 택하는 상황을 그릴 때의 시오노의 ‘썩 마땅해하는 필치’는 그의 저작 곳곳에 두드러진다. ‘상황이 무엇인가, 핵심이 무엇인가, 전략이 무엇인가, 선택이 무엇인가’에 중점을 두고 여타의 도덕적 딜레마나 인간적 약점은 눈감아준다. ‘로마인의 덕목’이라고 칭송해 마지않는 ‘실용적 관용성’이라는 것을 시오노 자신이 통째로 삼켜 버린 게 아닌가 싶을 정도다.

강준만의 현실주의. “최선이 아니고 차선도 아니라, 최악보다는 차악이 낫다.”라고 말하는 현실성, 언론 비판 와중에서도 시장 메커니즘의 구조적 실체를 짚어 내는 역량, 상업적 성공이란 오히려 추구해야 할 전략이라고 밝히는 배짱이 인상적이다. 이념적 비판에 불과한 것 아니냐고 지레 여겼던 독자들도 그의 글을 읽으면 강준만의 현실적 논거에 설득될 정도다. ‘기득권, 주류 콤플렉스, 패거리 의식’의 정치경제학을 꿰뚫어보는 것은 현실적인 역량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 아닐까. 인간의 ‘욕망’과 ‘겁’의 심리적 역학을 짚어 내는 강준만의 역량도 발군이다.

그런데 이렇게 현실적으로 분석하던 사람들이 자신의 지향성에 대해서는 어떻게 그리 낭만적이 될까? 시오노는 ‘영웅적 낭만주의’를 여전히 사랑한다. 이 시대에 카이사르 같은 리더십을 바란다고 거듭 강조하면서 말이다. 시오노의 일본적(?) 정황, 이를테면 카리스마적 리더의 결핍증 속에서 영웅을 기대하는 심리야 이해되지만, 그러한 것을 이 시대의 지향점으로 주장하는 데 이르면 갸우뚱해지지 않을 수 없다. 시오노가 도도하게 그려 내는 ‘제도적 시스템 위에 버티어 선 로마와 르네상스의 합리성’이 갑자기 빛이 바래는 듯싶다.

강준만은 ‘혁명적 낭만주의’ 아닐까. 현실의 제약과 인간의 허점을 피 철철 흐르듯 파헤쳐 놓고 나서는 강준만은 그것을 넘어서라고 요구하는 식이다. 가능한 일일까? 인간이 그렇게 혁명적인가, 그렇게 용감할 수 있나, 그렇게 관대할 수 있나? 보통 인간이 위선을 넘어설 만큼 그리 위대하며, 사회라는 것이 그렇게 개혁적으로 바뀔 수 있도록 단순한가? ‘국민은 개혁을 말하지만 진짜 개혁을 원하진 않는다.’ 같은 자신의 분석에서 나타나듯, 강준만의 글 뒤에는 허탈감이 남는다. 끓어오르지만, “과연 어떻게?”에 대해서는 속수무책으로 남겨진 듯싶은 것이다.

 

5. ‘작가’적 한계일까? 의도일까?

시오노와 강준만의 낭만적 한계는 ‘현실과 일정하게 거리를 둔 작가’로 자신을 자리매김하기 때문에 나타나기도 할 것이다.

시오노는 이런 작가적 위치를 즐길 듯도 싶다. 외국에 체류하며 자국인을 매혹하는 글을 자국어로 쓰면서 때로 지혜로운 ‘델파이’로 대접받는 위치란, 이를테면, 우아한 사치다. 사실 항상 의아스러운 것은, 왜 시오노의 저작이 영어 또는 이탈리어로 번역되지 않는가이다. 일본 주류권에서 인정받는 작가이고 보면 충분히 지원이 가능할 텐데 말이다. ‘그 주제 문화권’에서의 평가 없는, 또한 당장의 진흙탕 사회에 발 담글 필요 없는 시오노의 작가적 한계일 것이다. (좌 및 하 캐리커처: 안중걸 그림, <김진애의 남녀열전> 중에서)

‘현실과 거리를 둔 작가로서의 강준만’? 반대할 사람도 많겠다. “논쟁을 사리지 않는 현장적 지식인으로서의 강준만이 어떻게 작가냐.” 하고. 그러나 강준만은 논쟁의 지뢰밭에 있다고 하지만 실제는 ‘별로 터지지 않는 지뢰밭’ 에 있는 건 아닌가. 터져 봤자 찻잔 속의 태풍이라 할까?

강준만은 자신을 스스로 유배시키는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는 듯싶다. 공간적으로 시간적으로 활동 방식을 제한하고, 자의든 타의든 매체를 한정짓고, 노골적 화법과 전투적 스타일을 고수함으로써, 강준만은 그가 시시비비를 거는 사람, 조직, 이슈의 열고 싶은 욕구 자체를 아예 미봉하는, 기묘한 위치를 즐기는 것이나 아닐까? ‘컬트(cult, 숭배)의 대상’ 또는 ‘상대하지 않는 게 이로운 존재’라는 이상한 위치에 서 있는 강준만. 작가로서야 누릴 수 있는 특권일 수도 있겠지만 그가 던지는 이슈로 볼 때 과연 효과적인 전술일까 하는 의문도 때때로 든다.

6. 권력을 다루는 작가, 그 파장과 전염성

시오노나 강준만이 만든 신드롬은 2004년 이후에 상당히 줄어들었다. 12권 이후 로마의 쇠락을 본격적으로 그리는 『로마인 이야기』는 그 흥미로움에도 불구하고 역시 제국 구축이라는 성공 스토리보다 인기가 덜하다. 강준만은 참여정부 출범과 2004년 총선 전후 정당 판도의 변화에 대해서 비판적 칼을 들이대면서 이른바 진보 지식인들 사이에서도 균열을 보여 주고 있다. 한동안 정치 평론은 쓰지 않겠다고 선언한 적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요한 시점마다 현실적 시각을 던져온 강준만의 행보에 비추어 그의 영향력이 간단없이 지났다고 보기는 어렵다.

여하하든 작가로서 시오노와 강준만의 파워는 상당하다. 새로운 시각과 행보를 갈구하는 ‘상대적으로 새로운 마인드’를 가진 수많은 독자들에게 이들은 새로운 시각을 던져 준다. 시오노는 권력이라는 필요악을 담담하게 보는 태도, 서구를 독자적으로 해석하는 용기나 역사를 입체적으로 보는 상상력을 불러일으켰다. 적어도 나에게 있어 시오노 저작의 의미는 ‘그 상황, 그 인물, 그 선택, 그 결과가 얽히는 그림’을 보다 냉철하고 현실적으로 읽게 해주는 데 있다.

강준만에 대해서는 나 역시 갈등적일 수밖에 없다. “이슈적 파장은 약하고 스타일적 전염성만 높은 게 아닐까, ‘강준만 식’으로 세상을 읽고 보는 마니아 독자들이 강준만 이상을 뛰어넘을 수 있을까, 강준만은 이슈와 스타일을 익히 소화하겠지만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하는 의문도 종종 든다. 그렇지만 나에게 있어서 강준만의 의미는, 그가 택한 실천과제나 소통 스타일에 꼭 동의하지 않더라도 그의 이슈를 끌어안을 전략에 대해 고민하게 만드는 데 있다.

이제 시오노는 그의 대장정을 마무리하는 단계에 있지만 강준만은 또 다른 진화 단계에 있다. 시오노는 과연 내리막길 로마에서의 권력 문제를 어떻게 다루어 갈까? 로마 제국의 흥성만큼이나 그 쇠망의 핵심을 명쾌하게 드러낼까? 그 누구, 그 어떤 세력에 대해서도 서슴지 않는 강준만의 권력 비판의 내용과 형식은 어떤 모습으로 진화해 갈까? 권력과 한 판 승부를 겨루는 작가의 또 다른 단계를 기대하지 않을 수 없다.


☆ 읽으신 글이 마음에 드셨다면 잠시 스톱!☆ 김진애의 블로그가 맘에 드신다면 RSS버튼을 클릭해서 구독해주세요
, , , , , ,
1 Trackbacks , 1 Comments

« Previous : 1 : ··· : 294 : 295 : 296 : 297 : 298 : 299 : 300 : 301 : 302 : ··· : 469 : Nex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