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리 선생님, 결국 떠나셨군요. 어린이날 가시다니, 참 박경리 선생님 답습니다.

박경리 선생은 어릴 적부터 저의 위대한 여인이었지요.
처음에 남성으로 알았던 박경리, 나중에 여성이라는 것을 알고 아주 기뻤했답니다.
여인(女人)을 여성인간(女性人間)의 줄임말로 이해되는 거인 박경리,
저는‘주름 많은 치마폭을 두른 큰 산, 박경리’
 ‘뿌리인간 박경리’라 표현하곤 한답니다.

제가 썼던 박경리 흠모의 글들을 모아봅니다.
 한번도 못뵈었지만 항상 곁에 있는 듯, 떠올리면 든든한,
같은 시공간에 계시다는 것이 그저 좋던 박경리 선생님,
가셔도 여전히 계시겠지요. 그 생명력으로 우리를 다시 생생하게 해주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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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지>의 무대인 평사리를 내려다 보는 최참판 댁 사랑채 마루에서.

기실, 평사리와 최참판댁은 모두 박경리 선생님 머리의 상상이었다는 것이 믿어지세요?

저도 실제의 무대가 있다고 생각했으니까요. 지금 있는 곳은 재현한 평사리 마을이랍니다. 그런데도 가보면 정말 평사리 같아요.

섬진강변의 풍요로운 평야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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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나에게 다가온 첫 위대한 여인은 ‘박경리’ 선생이었다. 나는 첫 책으로「시장과 전장」을 보았는데 그 후 「김약국의 딸들」「가을의 여인」을 찾아보면서 참 기분이 괜찮아졌다.

우선 그 긴장감이 좋았다. 내 어렸을 시절 문학으로 많이 읽힌 것은 소위 고전이었고 근대문학이 많았는데, 서정성이 강한 근대문학을 권장하는 분위기여서 솔직히 그리 역동감이 없던 기억이다. 그런 나른함에서 탈출할 수 있었던 것이 1960년대의 치열하고 고민 가득하고 딜레마를 제기하던 전후문학들이다. 예컨대 최인훈의「광장」같은 소설은 사실 당시 나이로서 이해하기 어려웠어도 여전히 그 치열한 박동감을 즐겼던 기억이다. 숱하게 많은 책들을 접했던 이 시절에 박경리 선생을 발견했을 때의 행복감이란 말할 수 없이 좋았다.

게다가 처음에 나는 박경리 선생을 남자로 알았었다.
여자 작가가 귀한 시절이었고 요새처럼 작가들 얼굴이 대문짝만하게 신문 광고에 등장하는 시대도 아니었으니 나는 당연히 남자로 생각했었다. 책을 읽고 나서도 여전히 나는 남자로 생각했다. 함자 석자마저도 ‘남자스러운’ 데다가, 책의 내용 역시 전혀 여자가 쓴 것 같지 않았으니, 어린 나의 고정관념이 작용했던 셈이다. 나중에 언니 오빠들의 대화를 듣고 여자임을 알고는 너무도 신기하게 생각되어 다시 한번 책을 읽던 기억도 난다. 여자가 쓰는 글에서 여자를 알아낼 수 있는 단서를 찾아보려는 어린 마음에서 였다. 나는 당시에 전혀 알아 낼 능력이 없었고, 사실은 지금도 잘 모른다.

글을 보면 분명 여자가 쓴 글이라는 냄새가 물씬한 글이 있고, 분명 남자가 쓴 글이라는 냄새가 물씬한 글이 있기는 하다. 그런데, 그렇게 두드러지는 글이란 어차피 별로 재미없는 글 아닐까? 진짜 괜찮은 글이라면 여자, 남자를 그 글에서 알아낸다는 불가능하지 않을까? 분명 위대함이란 여자, 남자의 성이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성을 초월하는 그 어떤, 사람됨의 위대함이라는 것이 있는 것 아닐까?”

               『여자, 우리는 쿨하다』 책 중, “어린 시절, 나의 위대한 여인” 중에서
              (김진애, 한길사,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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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리 선생에 대한 어린 시절 나의 발견이 나에게 얼마나 큰 힘이었는가는 이미 앞에서 얘기했다. 그러다, 대학 시절 드디어「토지」를 만났을 때의 내 감격은 참으로 컸다. 지난 역사가 비로소 나에게도 살아있는 의미로 다가왔다고나 할까? 아마도「토지」는 다른 어떤 문학보다도 ‘역사적 의미’와 ‘역사의 개인 의미화’를 교차시킨 문학으로서 언제나 생생한 의식을 일깨우는 작품으로 후대에도 기록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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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을 공부하던 나에게 특별한 의미도 있었다. 나는「토지」를 보며 우리 강산, 우리 전통 건축의 아름다움에 눈을 떴다고 과언이 아니다. 하동(河東), 화개장터(花開), 평사리, 어찌 이름도 그리 예쁜가. 그 구비구비 섬진강과 그 비옥한 옥토들, 그 대문 높은 집, 그 담장 펼쳐진 집이 머리 속에 그려졌다. 게다가 집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삶의 이야기는 얼마나 입체적이든지. 나는 우리 전통 집의 심성에 대해 그 무엇을 알 것 같았다.

제가 우리의 한국 옛 집, 마을, 땅의 아름다움과 뜻에 대해 눈뜨게 만든 책이거든요. 사진이나 답사나 건축 책이나 사진 책이나 영화보다 더 절절하게 그 ‘관계’들을 느끼게 되었던 소설입니다. 아름다움도 있고 처연함도 있고 안타까움도 있고…….

윤씨 부인의 기품이 배어 나오는 모습에서 ‘안채의 품위’를 알았고, 아름다운 별당 아씨의 모습을 그리는 남자의 모습에서 ‘담의 의미’도 알았고, 자의식을 떨치지 못하는 아들의 처절한 자기 정체성 고민을 보여주는 ‘사랑채의 외로움’, 무당의 딸과의 사랑이 펼쳐지는 사당, 절도와 미래 구상과 포용이 펼쳐지는 절, 그 묘향산의 진달래 꽃, 섬진강의 구비구비 아름다움 등 ……. 참 박경리 선생님의 힘있으면서도 안타깝고 절절하게 그리시는 필력에 가슴을 울리며, 비로소 우리 건축, 우리 강산, 우리 문화의 아름다움을 느꼈던 그런 문학이었습니다. ‘눈’으로 보는 건축과는 그렇게도 달라요…….

지금도 박경리 선생을 신문이나 텔레비전에서 뵈면 든든하기 짝이 없다. 그냥 좋고, 같은 시대, 같은 공간에 살고 있다는 것이 뿌듯하다. 여전히 가장 좋은 모습은 땅을 일구는 모습이다. 든든한 가이아의 모습을 느낀다. 홀로 글을 쓰는 외로움을 찾기 위해서 사람을 만나지 않는다는 고집도 좋고, 땅을 일구며 오히려 글을 쓸 에너지를 찾는다는 모습도 너무 좋다. 정말 용기 있게 보인다. 그의 혼이 그대로 느껴진다.     ....................

이들 위대한 여인들을 나는 나의 혼의 친구라 일컫는다. 사실대로 말하면, 나는 그저 팬일 뿐이다. 한번 사람을 발견하면 나는 그냥 팬이 된다. 다만, 조용한 팬이다. 그들의 작업, 그들의 행적을 찾아보고 밟아보곤 한다. 그들 얘기가 여기 저기에서 나오면 반가워하고 뿌듯해 하는 정도의 조용한 팬이다.”

        『여자, 우리는 쿨하다』 책, “성찰기, 나의 위대한 여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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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리의 인터뷰 중에서 “다시 태어나면 건축가를 하고싶다”는 대목이 있다. 분명, 박경리는 ‘자연 파괴’라는 건축가의 운명적 속성을 뛰어넘는 건축가가 될 것을 나는 믿어 의심치 않는다. 이 생에서 박경리는 글로 건축을 한 것 아닐까? 나는『토지』에서 우리 한옥과 마을의 생생한 아름다움과 뜻을 언어를 통해 먼저 깨우쳤다. 나중에 소설 속의 공간이 온통 박경리의 상상 공간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나는 그 속아버린 것에 아주 기분 좋아졌던 것은 물론이다. 최근 지어졌다는 하동 평사리의 ‘최참판 댁’이 과연 소설 속의 공간 상상력만큼 실제로 살아났을까?                  ..........

박경리는 심플하다. ‘원초적’이라는 말이 더욱 맞을 것이다. 말이 별로 필요 없다. 눌변은 아니지만 부끄럼을 타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공적인 자리에 나서지 않기도 하거니와 그의 메시지는 ‘수사’가 필요 없다. 생명, 염치심, 수고함의 가치, 보잘 것 없음에 대한 감사함.   ......

박경리가『토지』의 최치수를 자신의 분신처럼 생각한다는 인터뷰를 본 적이 있는데, “아하!” 했었다. 자신의 태생의 비밀을 막연히 짐작하면서도 감히 입에 내지도 못하고 배신의 배신을 거듭 겪으면서도 꼿꼿이 자신을 지키는 것. 박경리의 깊은 콤플렉스, 그리고도 버텨나는 자존심은 뿌리 인간을 지켜내는 힘이 아닐까?”

『남녀열전』책, “뿌리인간 박경리 vs. 날개인간 이어령” 중에서

 (김진애, 샘터사,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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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가장 만나보고 싶은 인물은 작가 박경리다. 별로 말은 필요 없을 듯싶다. 꼭 같이 해보고 싶은 게 하나 있는데, 나란히 밭을 매는 일이다. 아무 말 없이 시골 아낙네처럼 머리에 수건 쓰고 같이 땅을 만지면 그 자체만으로도 무언가 통할 듯싶다. 큰 산 같은 박경리, 그 큰 산은 마치 우리옷의 치마처럼 주름이 철렁대고 주름 잡힌 치마처럼 깊은 주름을 안고 있는 큰 산 같은 박경리, 그 주름 사이사이에 숨은 이야기들은 그의 작품을 통해 듣고, 그를 만나서는 그저 감이 통했으면 좋겠다.”

              『남녀열전』책, 에필로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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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젊은 시절 박경리 선생의 아름다운 자태 사진을 찾다 못해 이 사진첩을 넣는다. 젊은 사진을 보고 깜짝 놀랐던 적이 있다. 어찌나 근사하신지. 우리가 기억하는 박경리 선생은 이미 유쾌하게 나이 드시고 난 후의 모습이다. 얼마나 멋진가. 오른쪽 아래 사진은 그 사진 하나로서 파워가 뿜어나온다.)

*** 박경리 선생님이 뇌졸증으로 혼수상태에 있다는 뉴스가 있었습니다. 지난 4일에 입원하셨다네요. 다행히 25일 뉴스에는 의식이 돌아오셨다고 합니다. 올해 82세. '뿌리깊은 큰 산 박경리'의 힘을 차려주시기를... 완쾌를 기원합니다.

*** 의식이 돌아오셨다는 뉴스는 오보였네요. 27일 일요일에도 계속 의식불명이시랍니다. 걱정하는 사람들의 마음이 전해지고 있네요. '생명의 존엄'을 생각하게 됩니다.
 
*** 오늘 어린이날, 드디어 떠나셨습니다. 그의 생명력은 계속 그의 책을 통해 뿜어져 나오겠지요...

*** 0506 새벽에:
어젯밤 MBC 뉴스에서 박경리 선생님의 짧은 일대기를 보면서, 눈물을 쏟았습니다. 돌아가신 엄마 생각과 더불어 그랬던 것 싶습니다. 5월 4일 울 엄마 기일, 5월 5일 박경리 선생님.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연상될 듯. 연세도 비슷해서 한 살 차이세요.
 
뉴스 중에 제가 그렇게도 반했던 젊은 시절의 아름다운 자태 사진이 나와서 어찌나 반갑던지. 서재에 있는 사진인데, 아마 40대 시절인 듯 합니다.  단아한 자태에 올곧은 풍모. 젊을 때는 '서희' 같기도 하고 '윤씨부인'일 듯도 싶고. 우리 남편은 박경리 선생님은 늙은 모습일수록 더 멋있다고 합니다. 우리도 그렇게 '힘'있게 나이 들어가면 오죽 좋을까요. 박경리 선생님의 힘은 '뿌리 깊은 힘'이라 오래가고 계속 자랐던 것이 아닐까요. 우리의 뿌리도 그렇게 깊어지기를.

아래 누리꾼의 '소풍'이라는 말씀이 너무 좋군요. 이생에 잠시 '소풍' 나오셨다는 말씀. 소풍을 끝내고 발 가볍게 집에 돌아가셨기를.  마지막 남긴 시의 마지막 구절이 '홀가분하다'인데,
'이제 버릴 것만 남아서 홀가분하다'라는 구절. 참 박경리 그래로의 시구입니다.  

***  박경리 영정에 대한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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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리 선생님의 영정으로 위의 오른쪽 아래 사진을 써서 아주 좋더군요.

이 사진이 가지는 이미지 파워는 굉장한 것 같아요. '단순'하면서, '성찰'적이고, '지혜'로우면서 '열정'적이고, 그윽하게 관찰하면서 내 눈을 깊이 들여다 보는 듯한 이미지...
사실은 전체 사진을 다봐야 하는데... 오른쪽 아래에 고추 보이시지요. 고추 따고 다듬는 모습이랍니다.
영정에서는 얼굴 중심으로만 보여주지요.


*** 박경리와 한나 아렌트
트랙백 기사를 보니 '박경리의 존엄'을 얘기하시는데, 바로 이 점에서 저는 박경리와 한나 아렌트를
'존엄'의 틀에서 두 위대한 여인으로 꼽는답니다. 두 여인 모두 고통의 역사를 살아오시면서 인간의 존엄을 각기 문학으로, 철학으로 세상과 소통해 내신 분들이지요. <토지>를 읽는 김에 한나 아렌트의 <인간의 조건>도 읽어보세요.  
 
*** 박경리의 명언

" 포기함으로써 좌절할 것인가,
저항함으로써 방어할 것인가,
도전함으로써 비약할 것인가,
다만 확실한 것은
보다 험난한 길이 남아 있으리라는 예감이다."
<<토지>> 서문 중에서(1973년 6월 3일 밤)

위 말이 너무 좋아서, 제 책에서 인용한 적이 있습니다.

*** 5월 9일 아침,
박경리 선생님 오늘 드디어 고향 통영의 미륵산 흙으로 돌아가십니다.
불행과 고통에서 길어올린 뜻과 의지를 후시대 사람들에게 남기셨으니
고이 잠드소서.
그리고 앞으로의 역사에서 생생하게 살아 계셔주소서.
 삼가 절을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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